기계가 움직임을 대신해주는 시대다. 계단 대신 엘리베이터를 타고, 먼 거리를 걸을 필요도 없고, 물건을 들거나 몸을 써야 하는 일도 점점 줄어들었다. 편리함이 높아진 만큼 우리가 실제로 움직여야 하는 이유는 거의 사라진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요즘은 운동하지 않아도 살아가는 데 문제가 없다”고. 하지만 편리함의 뒷면에는 몸이 잃어가는 아주 중요한 감각이 있다. 움직임이 사라질수록 몸의 언어도 함께 사라진다는 사실이다.
활동이 줄어들면 먼저 바뀌는 것은 ‘감각의 생생함’이다. 몸은 움직일 때 가장 뚜렷하게 살아난다. 걸을 때 균형을 잡고, 계단을 오를 때 중심을 세우고, 팔을 쓸 때 근육을 조절하는 미세한 감각들. 이런 감각들이 줄어들면 신경계는 몸의 지도를 느슨하게 기억하기 시작한다. 그러면 몸의 중심을 잡는 능력뿐 아니라, 마음의 안정감도 함께 흐릿해진다. 활동 저하가 단순히 체력이 떨어지는 문제가 아니라, 몸이 세상을 해석하는 방법 자체를 약하게 만드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또한 움직임은 감정의 흐름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몸을 움직이면 생각이 풀리고, 감정이 내려앉는다. 그러나 활동량이 적어질수록 감정은 몸 안에서 갇힌 듯 돌고 돌아 점점 무거워진다. 몸은 움직여야 감정을 ‘흘려보낼 출구’를 얻는데, 그 출구가 막히면 감정은 쌓이고 쌓여 불명확한 피로감이나 이유 없는 무기력으로 나타난다. 그래서 움직임이 줄어든 시대일수록 사람들은 더 지치고, 더 불안하고, 더 쉽게 분노한다.
단지 운동을 해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삶에서 ‘몸을 사용하는 순간’을 잃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하다. 무거운 운동을 하지 않아도 된다. 다만 몸이 “나는 아직 움직일 수 있다”라는 메시지를 스스로에게 보내는 시간이 필요하다. 편의점까지 걸어가는 짧은 거리, 집 안에서 작은 물건을 옮기는 동작, 버스에서 한 정거장을 미리 내려 걷는 여유. 이런 활동들은 운동이라기보다 몸의 감각을 다시 불러오는 ‘회복의 신호’와 가깝다.
우리가 사는 시대는 편리하지만, 그 편리함이 몸의 필요를 사라지게 하지는 않는다. 몸은 여전히 움직임을 통해 세계를 느끼고, 감정을 흘려보내며, 자신을 재정렬한다. 움직임이 줄어드는 시대일수록 오히려 더 의식적으로 작은 활동을 되돌려 놓아야 한다. 활동은 사치가 아니라, 몸이 자신의 리듬을 잃지 않기 위해 필요한 가장 근본적인 대화의 방식이다. 그리고 그 대화는 아주 작은 움직임 하나에서 다시 시작된다.















